2014년 12월 15일 월요일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를 읽고서

화장실에서 잠깐 잠깐 읽을 책을 찾다 덥썩 물은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태조부터 마지막 순종까지의 조선왕조실록을 정리한 책이다.
왕의 통치기간, 가족사 및 주요 사건과 인물등을 간략히 서술했다.
각 실록 마지막에는 언제, 어떤 사람들이 실록을 만들었는지를 간략하게 기술해서 실록의 진정성에 대한 부분을 각자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

생각없이 몰랐던 부분 중에 중요한 하나는 고종, 순종 실록이 그 시대상황에 따라서 일본인들에 의해 편찬이 됐다는 사실이다. 생각없는 당연함이 주는 결과라 하겠다.

근데 이런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 전하기 위한 실록을 어디에다 보관했을까?

실록은 후대 사람들에게 역사적 사실과 교훈을 전하기 위해 편찬되었기 때문에, 실록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실록은 종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천재지변에 의해 없어질 위험이 크고, 또 곰팡이나 세균 등으로 인해 훼손될 수 있었기 때문에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실록을 보관하기 위한 특별 장소로 ‘사고’를 만들었습니다.
조선왕조 초기에는 내사고인 서울의 춘추관사고와 외사고인 충주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종대왕 때에 2개의 사고로는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추가로 건립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전기에는 총 4개의 사고가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 4개의 사고 중 춘추관사고, 충주사고, 성주사고가 불에 타면서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도 모두 불타 없어졌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지역 주민들과 사고 관리인들의 빠른 대처로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사고를 인적이 드물고, 보다 안전한 깊은 산속에 설치하는 방안이 제시되었습니다.
조선후기의 새로운 사고는 강화도 마니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에 외사고가 설치되어 내사고인 춘추관과 함께 5개의 사고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리고 강화도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으로 이후 정족산사고로, 묘향산사고는 여진족의 침략 위험이 높아지자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사고로 이동 설치되었습니다. [참고 : 어린이 조선왕조실록]

여기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로마인 이야기"도 같이 읽고 있는데 그 자료의 방대함과 상세함을 혀를 내두를 정도라는 것이다. 어떻게 기원전부터 그렇게 상세한 자료를 정리/보관할 수 있었는지 대단함을 느끼게 된다. 그 정리된 역사 기록 중에는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를 당대 철학자이자 변호사인 키케로(로마의 정몽주)가 친구인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한다.

간간히 드러나고 있지만, 각 개인이나 가문들이 소장한 자료를 같이 공유하고 정리해서 역사의 진실에 한발짝 더 다가갈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4년 11월 17일 월요일

Mac Yosemite(10.10) 에서 MySql 5.6.21 설치 실패 처리

> Mac Yosemite(10.10) 에서 MySql 5.6.21 설치시 아래와 같이 실패할 경우
> 참고 Url :  http://coolestguidesontheplanet.com/get-apache-mysql-php-phpmyadmin-working-osx-10-10-yosemite/


> 실패 이유 : 설치에 포함된 자동 시작/종료 Script 로 인해 발생함.
> 처리 방버 : 수동으로 시작/종료하도록 "사용자화 설치"로 진행함.
a. MySql install package를 이용해서 설치를 진행
b. 설치 유형 단계에서 "사용자화"를 클릭

c. 설치 리스트에서 "Startup Item"을 선택하지 않고 "설치"를 진행
d. 설치 성공함.

e. 시스템 환경설정에서 mysql 을 시작할 수 있다.




2014년 11월 11일 화요일

올림과 드림

일반적으로 메일 끝에 '올림' 혹은 '드림' 아니면 '배상'을 사용하곤 합니다.
이 말에 대한 설명을 찾아봅니다.

일단, '배상'은 한자로 '삼가 올림'의 뜻입니다. 다만, 굿이 한자를 사용할 이유가 없으므로 특별한 경우 이외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여기서 삼가다는 '무엇을 꺼려 몸가짐 따위를 조심스럽게 하다'의 뜻입니다.

'드림'은 '주다'의 높임말이고 '올림'은 '올리다'의 높임말로 '윗 사람에게 드리거나 바치다'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드림'보다는 '올림'이 더 공손한 느낌을 줍니다.
나이가 비슷한 또래에게는 '드림', 윗 어른에게는 '올림', 더 공손한 표현으로는 '삼가 올림' 정도면 너끈할 듯 하다고 합니다. [출처 : 한글학회]

'우리말은 서럽다' 저자인 김수업 선생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신다.
'올림'은 받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다는 뜻으로 쓰인 말이고, '드림'은 주는 것이 보잘것 없어서낮은 곳에 아무렇게나 슬쩍 들여놓는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받는 사람을 높이고 주는 이를 낮추는 뜻은 다를 바가 없지만 마음을 두는 곳이 상대냐 자기냐에 따를 서로 조금씩은 다른 말이라는 것이다.

덧붙어, 편지 봉투 겉에 보내는 사람을 흔히 '아무개 올림' 또는 '아무개 드림' 이라 쓰고 봉투 속에 담긴 편지글 끝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쓴다. 봉투 겉에 쓰는 것은 봉투 속에든 글을 하나의 물품으로 보고 그것을 올리거나 드리거나 한다는 뜻으로 쓰는 것이라 좋지만, 봉투 속에 든 글은 바로 말씀을 올리거나 드리는 것이므로 사정이 다르다. 말씀을 올리거나 드릴 적에 쓰는 우리말이라면 '사룀'과 '아룀'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사뢰는 것은 속살과 속내를 풀어서 말씀드리는 것이고, 아뢰는 것은 모르시는 것을 알려 드리려고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출처 : 한겨레 사설  [말뜻말맛] 올림과 드림 / 김수업]




2014년 10월 29일 수요일

우리말은 서럽다(김수업)을 읽고

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띄어 읽게 된 우리말에 대한 책 "우리말은 서럽다" -김수업.
한자나 영어에 밀려서 사라지는 우리말을 안타깝게 생각하시고, 우리말과 그 의미를 풀어서 적고 있다. 더불어 [표준국어대사전]의 모호한 풀이도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전에 시골에서, 어른들에게서 친구들이랑 가끔 듣고 말하고 하던 우리말을 거의 잊어버리고서, 요즘은 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한자나 특히 영어에 목메달고 살고 있는듯 하다.

사실 내가 사용하는 많은 말 중에 한자나 영어가 상당히 쓰이고 있다. 물론 한자나 영어를 쓴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말을 하쟎게 생각하고, 많은 아는 듯한, 많은 배운 듯한 느낌을 상대방에 주기 위해서 은근히 사용하는 모양새가 있다는 것이다.

얼마전 본 동영상에서 김제동이 "아니, 우리나라에서 영어 못한다고 괄시받고 사는 이상한 상황이 되었다고,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말 못하는 것도 아니고 외국어인 영어를 못한다고 괄시받는게 말이 안되는 것이라고. 미국사람에게 물건 팔사람은 두 단어만 알면 된다고. Thank you, Fuck you. 물건 사주면 Thank you, 안 사주면 Fuck you!!!! 라고". ㅎㅎ
필요한 사람만 필요에 따라서 익혀서 필요한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지금 이글을 쓰면서도 한자를 대도록 안 쓰려고 하지만 툭툭 튀어 나온다. 사용, 유식, 경향 등.....

본문 내용 중에서 "우리"와 "저희"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다.
'우리'라는 낱말은 '나'를 싸잡아 여러 사람을 뜻하는 대이름씨다. '여러 사람'에는 듣는 사람이 싸잡힐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따. 이런 대이름씨는 다른 겨레들이 두루 쓴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우리'라는 대이름씨 낱말은 다른 대이름씨와 마찬가지로 매김씨로도 쓰인다. '우리 집, 우리 마을, 우리 나라, 우리 회사, 우리 아기, 우리 어머니....' 이런 매김씨 또한 남다를 것이 별로 없는 쓰임새다.
그러나 외동도 서슴없이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라 하고 마침내 '우리 아내', '우리 남편'에 이르면 이런 매김씨야말로 참으로 남다르다. 그래서 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건 잘못쓴 것이고 틀린 말이라는 사람까지 나왔다. 하지만 여기 쓰인 매김씨 '우리'는 나를 싸잡아 여러 사람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듣는 사람을 싸잡아 쓰는 것도 아니며, 다만 나와 대상을 싸잡아 쓴는 것이다. 나와 대상을 싸잡으면 둘이니까 '우리'가 되는 것이지만, 드러내는 뜻은 '둘'이 아니라 '서로 떨어질 수 없이 하나를 이루는 깊은 사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 뿌리 깊게 얽혀 살아온 우리 겨레의 자랑스러운 삶에서 빚어진 남다른 쓰임새다.
외동이 '우리 어머니'라 하는 것은 '나와 어머니'가 둘이면서 서로 떨어질 수 없이 하나를 이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아내가 '우리 남편'이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나와 남편'이 둘이면서 서로 떨어질 수 없이 하나라는 뜻이다. '우리 아버지' 하지 않고 '내 아버지' 한다든지, '우리 마누라' 하지 않고 '내 마누라'하면 그것은 정말이지 우리네 자랑스러운 말씨가 아니다. '우리 아버지' 또는 '우리 마누라' 하면 나와 아버지 또는 나와 마누라가 둘이면서 떨어질 수 없이 서로 깊이 사랑하여 하나를 이루어 살아가는 '아버지' 또는 '마누라'가 되지만, '내 아버지' 또는 '내 마누라'하면 그것은 곧장 아버지 또는 마누라가 내가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며 내 손 안에 쥐고 살아가는 소유물로 만들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는 옛날이나 이제나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남편을 나에게 딸린 소유물로 여기지 않고, 나와 떨어질 수 없이 사랑으로 깊이 묶인 두 사람으로 여기며 사는 겨레다.

김수업 선생님의 책 "국어교육의 바탕과 속살", "배달말 가르치기" 등을 시간내서 읽어봐야겠다.


2014년 10월 23일 목요일

로마인 이야기 2,3권을 읽고

로마인 이야기 2권 (한니발 전쟁)
카르타고와 로마와의 1,2차 포에니 전쟁에 대한 이야기로 1차 포에니 전쟁에 카르타고군에 참가한 어린 한니발이 2차 포에니 전쟁을 지휘하며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이탈리아 전역을 유린한 전쟁.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로마연합의 전체와 맞선 전쟁은 초기에는 한니발의 우세였으나 카르타고 본국의 미진한 지원과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는 명장으로 똘똘뭉친 로마연합에게 자마전투에서 패하며 전쟁은 끝이난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안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술을 발전시켜 실전에서 시전한 한니발의 뛰어난 능력과 그 한니발의 능력을 또한 자기것으로 만들어서 발전시켜 사부랄 수 있는 한니발을 패배로 몰아넣은 스키피오의 능력, 그리고 로마 수도를 제외한 이탈리아의 대부분이 유린당하는 상황에서도 깨지지 않고 결속시키고 있던 로마연합의 공동체 구성방식이다.

희대의 명장 한니발과 스키피오이 만나서 나눈 대화중에 재미난 부분이 있다. 
스키피오가 "최고의 장군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한니발은 
첫번째는 "안렉산드로스 대왕" 이고, 
둘번째는 "피로스 왕"이고 
세번째는 "나 한니발"이다. 
그러자 스키피오가 만약 당신이 자마전투에서 나를 이겼다면 이라고 묻자 "
그러면 내가 첫번째다"라고 대답한다.  


포에니 전쟁(라틴어: Bella Punica, 포이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 사이에 로마와 카르타고가 벌인 세 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포에니(poeni, 포이니)'라는 말은 라틴어 Poenicus에서 나왔는데, 이는 페니키아인의라는 뜻으로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포에니 전쟁의 주요 원인은 당시 지중해에 패권을 잡은 카르타고와 새로이 떠오르는 로마의 이해 관계가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원래 시켈리아(시칠리아, 당시 이 섬은 여러 문화가 뒤섞인 곳이었다)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데 관심이 있었는데, 이 섬 일부 지역을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날 당시 카르타고는 광범위한 제해권을 갖춘 서부 지중해의 패권국이었으며,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급속도로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이었으나 카르타고 수준의 해군력이 없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끝날 당시 두 나라는 병력 수십만을 잃으며, 로마는 결국 세 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여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수도를 파괴하여 서부 지중해의 최강자가 되었다. 포에니 전쟁과 동시에 일어난 마케도니아 전쟁이 끝나고, 동부 지중해에서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가 패배하면서, 로마 제국은 지중해 전역에서 패권국이 되었다. - 참고 : 위키백과

로마인 이야기 3권(승자의 혼미)
주변 마케도니아, 아프리카, 시리아 등을 속국 혹은 동맹국으로 평정한 로마는 평화의 시대로 접으들듯 하나, 어디에나 일어나는 내정 문제가 서서히 발생한다.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꺽고 전쟁을 종결시킨 스키피오가 공화정 내부에서 실각하거나 공화정 내부의 파벌정치에 따른 유혈사태 및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이탈리아 귀국시 군대 해산을 해야하는 규율을 무시하고 힘으로 원로원을 장악하는 등의  내정 혼란의 시대가 계속된다. 이는 원로원, 민회등의 과두정치를 통한 공화정에 심각한 문제로 이후 4권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참고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역사적 비판 글이 있어 참조하면 좋은 듯합니다. 로마인 이야기 비판


2014년 10월 14일 화요일

파저강은 어디인가?

세종의 4군 6진 개척으로 조선의 북쪽 국경은 확고해졌다. 이중 4군은 최윤덕 장군의 1차 파저강 전투와 이천 장군의 2차 파저강 전투를 통하여 여진족을 몰아내고 완성하였다.


파저강 [참조 - 이광종 (Casey Lee) 블로그]


파저강 전투(婆猪江戰鬪)는 조선 세종 시기 1433년 최윤덕 등 북방 장수들이 오랫동안 조선을 괴롭히던 여진족들을 정벌하기 위해 여진족들의 근거지 파저강 유역을 소탕한 전투이다. (참고 : 위키백과)

파저강 전투에 큰 공을 세운 "최윤덕" 장군에 대한 상세는 내용은 2011/9/1일에 방영된 역사스페셜 "최윤덕, 조선의 국경을 세우다"를 통해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참고 :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KKTk&articleno=7390885) 


4군은 압록강 상류인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武昌)·우예(虞芮), 6진은 두만강 하류 남안에 설치한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이다.
4군 6진 [참조 : 우리역사넷] 






2014년 9월 22일 월요일

로마인 이야기 1권을 읽고

누구나 참 쉽게 역사를 읽을 수 있도록 쓴 책이다. 그 당시의 세력 지도와 같이 보여주니 당시의 주변 세력과의 힘의 역학관계에서 서서히 발전하는 로마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데 도움이 훨씬 된다. 지금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같이 읽고 있는데 지도가 없어 주변국이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하기사 조선왕조실록이니까 그렇긴 하기도 하다.
그리고 정도전의 신권 강화를 위한 왕자들의 사병혁파를 한다고 했는데 도대체 군부나 왕자들의 사병의 힘은 얼마나 되었기에 왕자들과의 분쟁을 하면서까지 개국초기에 시행하려 한 걸까? 등등... 

내용중 놀라운 것은 로마의 발전은 주변국들을 정복 후 포용하는 정책을 썼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정책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까? 기득권이란 것을 어찌 내려 놓을 수 있었을까?

내가 이제까지 봐왔던 미드로 부터의 권력층들의 계층에 대해서 다소 오해가 있었든듯 하다.